그리스 신화로 보는 승리 뒤 언어의 절제 (에우리클레이아의 멈춘 환호, 책임과 과시,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22권에서 에우리클레이아는 쓰러진 구혼자들을 보고 환호하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그 소리를 막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묻고 싶다. 오래 겪은 침탈이 끝났을 때, 안도와 승리의 과시는 어디서 갈라지는가? 더구나 그 말을 한 오디세우스 자신이 곧 다른 이들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린다는 불편한 순서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에우리클레이아의 환호와 오디세우스의 제지 신화 이야기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에 돌아왔을 때 집은 그의 오랜 부재를 이용한 구혼자들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그들은 페넬로페에게 혼인을 압박하며 재산을 소비했다. 《오디세이아》 22권에서 오디세우스는 텔레마코스와 동료들의 도움으로 궁전의 구혼자들을 죽인다. 전투 직후 그는 아들에게 늙은 유모 에우리클레이아를 부르라고 한다. 이 여인은 앞서 19권에서 발을 씻기다 오디세우스의 흉터를 알아보고도 귀환의 비밀을 지켰다. 따라서 그녀의 안도는 갑작스러운 흥분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압박받던 집이 주인을 되찾았다는 감각도 그 안에 있다.
그러나 그녀가 들어온 방의 모습은 축하할 만한 식탁과 거리가 멀다. 시인은 오디세우스의 손발에 피와 오물이 묻어 있다고 묘사하고, 구혼자들의 시신이 쌓인 현장을 보여 준다. 에우리클레이아는 그 광경을 보고 큰 환성을 지르려 한다. 오디세우스는 즉시 그녀를 제지한다. 마음속으로 기뻐하되 큰소리로 외치지 말라며, 죽은 사람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경건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구혼자들이 손님을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어 파멸했다고 설명한다. 잘못의 책임을 말하는 일과 죽음을 전리품처럼 과시하는 일은 이 한순간에 분리된다.
그런데 이 장면을 온건한 승자의 아름다운 훈계로만 끝내면 원전을 왜곡한다. 바로 다음에 오디세우스는 에우리클레이아에게 궁전의 여자 종들 가운데 누가 자신을 모욕했는지 묻는다. 그녀는 쉰 명 가운데 열두 명을 지목한다. 오디세우스는 그들에게 시신을 옮기고 방을 청소하게 한 뒤 죽이라고 명한다. 텔레마코스는 그들을 매단다. 이 처우를 오늘의 독자가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원전은 앞의 말과 뒤의 폭력을 나란히 놓고 있으며, 내게는 바로 그 불일치가 해석의 핵심이다.
출전은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22권 390~473행이다. 특히 에우리클레이아의 환호와 제지는 398~418행, 뒤이은 종들의 처우는 419행 이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링크의 영어 번역은 A. T. Murray 판본이다. 나는 직접 인용 대신 장면의 순서를 옮겼다. 고대 서사의 집안 질서와 신적 운명 설명을 현대의 윤리 기준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신화가 담고 있는 환호의 상징과 철학적 해석
나는 에우리클레이아가 내지른 것도 아닌 멈춘 환성을 이 사건의 상징으로 읽는다. 마음속 안도는 실제 피해의 종료를 확인하는 감정이다. 반면 피가 흐르는 방에서 크게 환호하는 행위는 죽은 이들의 몸을 구경거리로 바꾸고, 곁에 선 사람들에게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하는 공포를 줄 수 있다. 오디세우스의 말이 설득력 있는 지점은 구혼자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지 않으면서도 시신 앞의 과시를 금한다는 데 있다. 사건의 평가와 표현 방식에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금지가 곧 오디세우스의 도덕적 일관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뒤이어 종들을 분류하고 처벌하는 과정에서 그의 권력은 훨씬 강하게 작동한다. 원전은 그 여성들이 구혼자들과 맺은 관계를 지배자의 시선에서 평가하며, 강요의 가능성이나 각자의 선택권을 오늘의 독자가 충분히 판단할 자료로 제공하지 않는다. 내가 이 장면에서 유지할 것은 죽음을 조롱하지 말라는 제한이지, 그 제한을 말한 사람의 모든 후속 처분이 옳다는 주장이 아니다. 승자의 좋은 문장 하나가 그의 행동 전체를 면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읽기는 앞서 쓴 페미오스의 간청 글과 같은 22권을 보지만 장면과 질문이 다르다. 그 글은 전투 중 강요받아 노래한 사람을 공모자로 묶지 않을 증거 기준을 물었다. 이번 글은 전투가 끝난 뒤의 공개 환호와 승자의 자기 절제, 그리고 말과 처벌 사이의 불일치를 묻는다. 개인별 책임을 따져야 한다는 판단은 유지하지만, 이제는 책임 판단을 하는 쪽의 언어와 권력도 검증 대상으로 넓힌다. 또한 이타카 맹약 글은 24권의 도망가는 유족 추격을 멈출 때를 다뤘다. 이번은 그보다 앞선 궁전 내부에서 환호라는 표현을 멈추는 기준이다.
반론은 있다. 오래 억눌린 사람이 가해 세력의 패배 앞에서 기쁨을 표현할 권리까지 빼앗는다면, 예절을 핑계로 피해자의 목소리만 묶게 된다. 그래서 나는 조용한 감정 자체나 피해 사실의 공개를 금하지 않는다. 중요한 구분은 피해의 종료를 알리고 책임을 요구하는 말과 상대의 파멸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말 사이에 있다. 장소, 청중, 검증된 사실, 곧 이어질 조치가 그 경계를 바꾼다. 신화의 대사는 현대의 신고 절차가 아니라 이 판단을 시험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현대인이 얻을 수 있는 지혜와 나의 소감
가상의 지역 협동조합을 생각해 보자. 회계 담당 임원이 조합 자금을 사적으로 썼다는 정황이 외부 감사에서 확인되고, 그는 직무에서 배제됐다. 몇 달간 의혹을 제기하다 무시당한 조합원들은 이제 공개 공지의 문구를 정해야 한다. 선택지는 셋이다. 첫째, 그 임원의 얼굴과 사적인 가족 정보까지 퍼뜨리며 ‘통쾌한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게시한다. 둘째, 갈등을 피하려고 사실을 거의 알리지 않는다. 셋째, 확인된 회계 항목과 조치, 추가 조사 일정, 피해 회복 경로를 공개하되 개인의 추락을 축하하는 표현은 뺀다. 이 사례는 실제 겪은 일이 아니라 판단 기준을 시험하기 위한 가정이다.
첫째 선택에는 분노를 나눌 즉각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족 정보는 회계 책임을 밝히는 데 필요하지 않고, 과장된 문구가 사실관계의 빈틈을 가려 법적 분쟁과 2차 피해를 키울 수 있다. 둘째 선택은 소음과 당장의 대립을 줄이지만, 손실을 입은 조합원에게 설명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잘못된 지출을 바로잡을 기한도 흐려진다. 나는 셋째를 고르겠다. 비용이 없는 길은 아니다. 감사 자료를 정리할 시간, 명예훼손 위험을 검토할 법률 비용, ‘왜 더 세게 말하지 않느냐’는 내부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그 비용은 사실 확인과 환급 가능성을 높이는 데 쓰인다.
결정 기준은 감정을 얼마나 억눌렀느냐가 아니다. 공개하는 문장이 피해 회복과 재발 방지에 꼭 필요한 검증된 정보인가를 한 문장씩 묻는 것이다. 부당 지출의 금액과 결재 경로, 직무 배제 사실, 환급 계획, 독립 감사의 범위는 관련성이 있다. 아직 조사되지 않은 사생활, 가족의 이름, 확인되지 않은 공범 추측은 빼야 한다. 조합원들이 환급 청구나 총회 표결에 필요한 자료라면 공개를 늦추지 말고, 조사 중인 대목은 미확정이라고 표시한다. 당사자에게 설명과 이의 제기 경로도 주되, 그 절차가 긴급한 자금 동결을 막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오디세우스의 다음 행동을 기억하면, 예의 바른 공지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조합 이사회가 ‘비난하지 말자’고 선언하면서 정작 계약직 직원들에게 일괄 책임을 떠넘긴다면 겉의 절제는 권력의 은폐가 된다. 누가 결재권을 가졌는지, 누가 강요받았는지, 손실은 어떻게 회복되는지 별도로 따져야 한다. 앞선 페미오스 글에서 다룬 개인별 책임의 구별이 여기에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 동시에 뒤의 맹약 글처럼 이미 위험을 통제한 뒤에도 보복성 압박을 계속할 이유가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 서로 다른 장면에서 얻은 기준을 한 사건에 조심스럽게 적용하는 것이다.
새 증거가 나오면 공지와 판단을 고쳐야 한다. 임원이 실제로 더 큰 자금을 빼돌렸다면 보호 조치와 공개 범위를 넓힐 수 있고, 일부 항목이 정상 지출이었다면 그 역시 정정해야 한다. 책임을 흐리는 침묵과 죽음을 즐기는 환호 사이에는 이렇게 번거로운 세 번째 길이 있다. 내가 처음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면, 안도는 침탈이 끝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정당하고, 승리의 과시는 상대의 파멸 자체를 성과로 팔거나 더 약한 이에게 검증 없는 처벌을 확장할 때 경계를 넘는다. 멈춰야 할 것은 책임 추궁이 아니라, 사실을 넘어서는 과시와 힘의 면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