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로 보는 다수의 침묵 (멘토르의 민회 발언, 방관과 공동 책임,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

텔레마코스가 구혼자들의 횡포를 민회에 알린 뒤에도 이타카 사람들이 흩어지려는 순간, 오디세우스의 옛 친구 멘토르는 왜 구혼자보다 침묵하는 다수를 더 꾸짖었을까? 나는 이 장면에서 남의 집 문제로 보이는 피해가 언제 공동체의 책임이 되는지 묻고 싶다. 누가 정의로운 편인지 즉시 선포하기보다,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피해 앞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첫 조치를 살펴보려 한다.

아테나가 새의 모습으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는 텔레마코스와 네스토르의 후대 그림

그림: Jean-Jacques-François Le Barbier I, Pallas Athene in the Form of a Bird Leaving Nestor and Telemachus, 약 1780년, National Gallery of Art. Wikimedia Commons, CC0. 민회 장면 자체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텔레마코스의 여정을 그린 후대 작품이다.

멘토르의 민회 발언 신화 이야기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2권에서 텔레마코스는 이타카 사람들을 오랜만에 민회로 부른다. 아버지 오디세우스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 구혼자들이 그의 집에 머물며 가축과 포도주를 소비하고 어머니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압박한다고 호소한다. 그는 자기 힘으로 이들을 막기 어렵다고 인정한다. 구혼자 안티노오스는 책임을 페넬로페에게 돌리고, 텔레마코스는 어머니를 뜻에 반해 쫓아낼 수 없다고 답한다. 누가 어떤 손실을 겪는지 이미 공개된 자리다.

독수리 두 마리가 민회 위를 날자 할리테르세스는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구혼자들의 파국을 예고한다. 에우리마코스는 새가 모두 운명을 알리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 반론 자체는 검토할 수 있지만, 그는 예언자를 벌금으로 위협하고 구혼자들의 소비를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텔레마코스는 배와 동료를 달라고 요구하지만, 회의에서 피해 중단이나 지원의 합의는 나오지 않는다.

그때 멘토르가 일어선다. 오디세우스가 떠나며 집안일을 맡긴 옛 동료인 그는 구혼자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남의 집을 해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오히려 수는 많은데도 그들을 제지하는 말을 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화를 낸다. 구혼자 레오크리토스는 많은 구혼자와 싸우기는 어렵다고 맞서며 모임을 해산시킨다. 사람들은 집으로 흩어지고 구혼자들은 다시 오디세우스의 집으로 간다. 멘토르의 발언이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본문의 근거는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2권 1~257행, 특히 224~257행(Theoi 수록 A. T. Murray 영어 번역)이다. 제우스의 새와 예언은 서사 안의 사건이다. 오늘날 시민회의 운영법이나 법적 의무를 호메로스가 규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또 뒤에 아테나가 멘토르의 모습으로 텔레마코스를 돕는 장면과 여기서 실제 멘토르가 말하는 장면은 구별해야 한다.

신화가 담고 있는 상징과 철학적 해석

나는 멘토르의 분노를 단순한 ‘용기 있는 사람은 앞장서라’는 구호보다 책임의 위치를 다시 그리는 말로 읽는다. 구혼자의 행동이 출발점이고 텔레마코스의 재산이 직접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민회는 피해가 알려진 뒤에도 이 일이 한 집안만의 일인지, 시민들이 어떤 범위에서 막을 수 있는지 결정하지 못한다. 멘토르가 구혼자의 수보다 시민의 수를 언급하는 까닭도 피해자가 혼자 감당할 일로 내버려둔 불균형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의 말이 나오기 직전의 순서에 있다. 텔레마코스의 피해 진술, 책임 전가, 예언에 대한 논쟁, 위협과 배 요청이 차례로 있었다. 시민들은 정보가 전혀 없어서 조용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새의 움직임만으로 귀환 시점이나 구혼자의 처벌을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예언의 진위와 눈앞의 무단 소비는 서로 다른 질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다투는 동안 확인 가능한 현재의 피해가 흐려질 수 있다. 멘토르가 관심을 돌리는 곳은 바로 그 공백이다.

반론도 중요하다. 레오크리토스의 말처럼 구혼자들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면 오히려 더 큰 피해가 생길 수 있다. 시민들이 모두 같은 정보를 가졌거나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깨는 일이 곧 무장 대결에 나서는 일이라고 읽지 않는다. 피해 진술을 기록하고, 당사자가 원하는 보호를 확인하고, 제지할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공동으로 요구하는 등 위험과 권한에 비례한 개입이 현대적 해석의 범위다. 원전은 그런 절차를 제시하지 않으며, 멘토르의 말도 성공한 집단행동의 사례가 아니다.

앞선 텔레마코스의 항해 글은 같은 민회가 실패한 뒤에도 텔레마코스가 소식을 찾아 떠나는 개인의 탐색을 다뤘다. 문제 제기가 해결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유지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떠나기 직전, 민회에 남은 사람들이 왜 공동으로 응답하지 못했는지 묻는다. 주체는 텔레마코스의 성장에서 멘토르가 지적한 시민들의 책무로 옮겨 간다. 폴리다마스의 경고 글이 지휘자에게 전달된 위험의 검증을 물었다면, 여기서는 한 집의 손실이 공개된 뒤 다수가 취할 수 있는 제한된 개입을 묻는다.

현대인이 얻을 수 있는 지혜와 나의 소감

가상의 공동주택에서 관리업체가 공용 수선기금을 승인 범위를 넘어 반복 인출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고 가정해 보자. 한 세입자가 계좌 내역의 금액과 날짜를 게시판에 올렸지만, 업체는 긴급 보수비라고 설명한다. 주민 대표들은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난방 설비 점검도 진행 중이라 갈등을 키우기 어렵다며 회의를 미룬다. 이는 실제로 내가 겪거나 목격한 사건이 아니라, 멘토르의 질문을 시험하기 위한 가상 사례다.

선택지는 세 가지다. 첫째, 업체 설명을 믿고 다음 결산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당장의 마찰과 회의 비용은 줄지만, 추가 인출이나 증빙 소실이 있다면 나중에 복구하기 어려워진다. 둘째, 의혹만으로 업체를 즉시 공개적으로 횡령범이라고 단정하고 계약을 끊는다. 자금 유출을 빨리 막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허가된 긴급 지출이었다면 명예와 계약 분쟁, 난방 점검 중단의 비용을 주민이 떠안을 수 있다. 셋째, 인출 계좌·결재 문서·공사 내역을 독립적으로 대조할 기한을 정하고, 확인 전에는 추가 비필수 지출을 공동 승인으로 제한한다. 당사자의 자료 접근권과 소명 기회를 보장하며 긴급 설비 보수는 별도 절차로 이어 간다. 이 선택에도 감사비, 담당자의 노동, 일정 지연과 주민 간 불편이 든다.

나는 셋째를 우선 택하겠다. 기준은 현재 확인 가능한 손실, 추가 유출의 속도, 제한 조치의 되돌릴 수 있음이다. 잔액과 인출 기록이 실제로 맞지 않고 앞으로도 자동 출금이 예정돼 있다면 임시 승인 장벽을 서둘러야 한다. 반대로 공개된 자료가 일부 기간만 잘린 사진이고 계약서·영수증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면 먼저 원본과 권한 범위를 확인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업체의 설명을 듣는 동안 주민의 돈이 계속 나가도록 두거나, 의혹을 제기한 세입자 한 명에게 모든 증명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조사 책임자와 자료 보존 방식, 일주일 뒤 재평가 날짜를 회의록에 남긴다.

이때 주민 다수의 역할은 ‘업체를 쫓아내라’는 한 목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니다. 회계 자료를 볼 수 있는 대표, 공사 현장을 확인할 사람, 계약상 지급 중지의 한계를 검토할 사람을 나누고 결과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세입자가 처음 금액을 잘못 읽었더라도 공개 검증을 요청한 행위 때문에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문제 제기만으로 업체의 부정이 확정되는 것도 아니다. 방관과 성급한 단죄 사이에 검증 가능한 공동 행동이 있어야 다음 제보도 살아남는다.

나는 멘토르가 구혼자보다 시민들에게 먼저 화를 낸 대목을 이렇게 받아들인다. 힘이 없는 한 사람이 손해를 호소했을 때 다수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은 그 사람에게 혼자 싸우라고 말하거나, 불확실하니 영원히 기다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확인할 기록과 권한을 함께 모아 위험을 낮춘 조치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했다고 개별 시민의 두려움을 곧 비겁함으로 판정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보복 위험과 접근 가능한 자료가 다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첫 과제는 안전하게 이의를 말하고 확인할 통로를 만드는 데 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멘토르가 다수를 꾸짖은 까닭은 구혼자들의 책임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공개된 피해를 해결할 가능성이 한 집안의 힘 바깥에도 있었는데, 그 가능성을 아무도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집 문제처럼 보이는 일이 공동체의 책임이 되는 때는 피해가 알려지고, 각자의 권한 안에서 안전하게 줄일 수 있는 손실을 함께 방치할 때라고 나는 판단한다. 이는 새의 징조를 믿는 문제와도, 무조건 싸우라는 명령과도 다르다.